
방송 제작에 도움을 주실 분 : 농협 060-02-192192·문경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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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비극입니다. 그래서 삶이 불행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판단의 문제입니다.
삶은 경험의 집적集積입니다. 육체는 경험의 집적체集積體입니다. 그런 육체가 판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마르티아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삶 자체가 비극에 빠진 것입니다.
자기 경험을 믿지 않는 것,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는 연습이 곧 경건의 연습입니다.
죽을 힘을 다하여 지금·여기 있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δόξα)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과 생각(δόξα)을 읽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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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두 목사가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 방송을 들으십시오. 삶이 새롭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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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4, 2020
7 min

방송 제작에 도움을 주실 분 : 농협 060-02-192192·문경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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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자기 경험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경험은 삶에서 쌓인 것입니다. 생존하려고, 말입니다.
내 경험을, 내 생각, 내 관념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따르자, 이것이 예수교입니다.
자기 경험을 믿으면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어느 십자가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 신앙은 영원한 삶을 말합니다. 요.3,16이 그것입니다.
죽어도 삽니다. 영생, 영원한 삶이란 죽어도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Nov 18, 2020
3 min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믿지는 않습니다.
부활을 믿었다면 삶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어야 합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덧 믿음은 관념적인 일로 자리잡았습니다. 머리로만 행하고, 몸으로는 행하지 않습니다. 그때도 그랬습니다.
그 때문에 야고보는 약.2,17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마구 욕합니다. 자기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서, 그럽니다
교회는 우리와 무엇이 다르겠지, 그런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기적 집단으로 보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기대한 것이 없으면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죽음은 무엇인지, 영원한 삶이란 또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의 현실 삶에 어떻게 관계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Jul 29, 2020
18 min

보통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믿음은 자기(몸)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루고 싶은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을 이루어 줄 줄로 믿습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애써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거기에 딱 맞는 믿음이 있습니다. 무속(巫俗) 믿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삶의 이 과정에 약간의 진통이 있습니다. 고통입니다.
성경에는 믿음(πίστις:피스티스=신앙)이라는 말이 애초에 없습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서 믿음(πίστις)이라고 번역한 말 모두가 신앙(πίστις)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시간이 흐르고 여건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바뀝니다. 죽도록 사랑하여 결혼하였어도 이혼하고 그럽니다.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여 우러르고 따르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은, 본질적인, 원래부터 있던 것을 인식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원하시는 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따를 것이냐, 이 문제입니다.
삶은 몸의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Jul 10, 2020
10 min

한 청년이 제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대로 옮깁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를 채운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연예인이 아닐까 합니다. 같은 인생인데 남들은 평생 노력해도 얻을까 말까 한 돈, 명예, 외모, 인기, 경험 모든 걸 다 가졌습니다. 그들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이 있을까, 무언가 부족함을 느낄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그곳에 가 본 적이 없어서 ‘그들은 불행할 거야’라며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처럼 자기 합리화, 자기 위로를 하는 게 아닐까요?
낑낑거리며 사는 저에게 그들의 삶은 너무나 빛나 보이고 의미 있어 보이는 질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공감하지 않습니까?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같은 마음을 것입니다.
이 질문을 가만히 보십시오. 남 이야기입니다. 자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의 형편이 나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하는 말로,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할까요.
행복이 그런 것이라면, 나의 행복을 위하여 남이 불행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행복은 남의 형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남이 행복한 그 모습에 나도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사랑하는 관계가 그러지 않습니까?
Jul 6, 2020
16 min

신神이라고 하면 우리보다 차원이 높은 존재입니다. 하위 차원의 존재가 상위 차원의 존재가 있다 없다,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이라고 정의한 이상 신은 있다 하여도 문제고, 없다 하여도 문제입니다. 신이 나보다 하위 차원이라면 내가 믿고 의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은 하위 차원의 내가 있다 하면 있고 없다 하면 없고,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문제는 그보다 앞서 생각하여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신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문제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많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였는데도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잘삽니다. 그토록 애썼는데도 실패로 끝나고 마는 일이 있습니다.
보통 생각으로, 세상의 이치는 애쓴 만큼, 공을 들인 만큼, 능력이 있는 만큼 더 좋은 결과를 얻어야 맞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여기서 좌절합니다.
내가 미처 모르는 무엇이 있지, 싶습니다.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의 총체總體를 신이라 하자, 이 문제입니다.
신은 있다 없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습니다.
Jun 26, 2020
8 min

인간에게는 어떤 그리움이 있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을 해소하지 못하여 이러고저러고 합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리움을 해소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든, 돈이나 권력을 사랑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입니다. 깊은 관계로 발전합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습니다. 연인이든, 깊이 사귀는 친구든,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에게 그런 관계를 기대하셨습니다. 또 그 수준까지 끌어올리셨습니다.
관계가 무르익었을 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15,14~16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친구, φίλος입니다. 마음을 터놓을 만한 아주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뜻이 통하는 사람입니다.
(줄임)
Oct 17, 2019
19 min

히틀러는 유대 인 600만 명을 잡아다 죽였습니다.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 인이 1,100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유대 인에 대한 각자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실상은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가축 병이 돌아 잡을 수 없스면 살처분殺處分합니다. 그런 가축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 Karl Adolf Eichmann은 히틀러 친위대의 중령이었습니다. 유대 인을 열차로 수송한 책임자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의 해외정보기관 모사드가 전범을 찾았습니다.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당당하였습니다. 자기는 누구를 죽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를 죽이라고 명령한 적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사실 아이히만이 유대 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실어다 주기만 하였을 뿐입니다. 자신은 군인이었고, 군인은 당연히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재판 과정 내내 아이히만을 지켜본 유대 인 여성이 있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였습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는 죄가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다만, 생각하지 않은 그것이 죄라 하였습니다.
아이히만은 사람으로서 마땅한 상상력을 포기하였습니다. 그것이 죄였습니다.
Oct 3, 2019
11 min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인생이 왜 있는 것일까요?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한번 생각하여 봅시다.
출근길입니다. 아파트를 나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옵니다. 다들 표정이 굳어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열심히 들여다봅니다. 급히 무슨 정보를 검색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단순히, 기계적입니다. 아침마다 똑같습니다. 대개의 삶이 이렇습니다.
어째서 삶이 이런 모습일까요? 먹고 사는 일이 원래 이런 것일까요?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세월이 가면 다 죽습니다.
죽고만 만다면, 그냥 거기서 끝난다면, 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살고 있으니 그냥 사는 것일까요?
어차피 죽을 인생입니다. 죽으면 돈도 권력도 명예도 거기서 모두 끝납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런 인생이라면, 더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을 깊이 인식한 나머지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인생만 놓고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시공간이 상대적이라고 밝힌 위대한 과학자 아인쉬타인이나 전쟁의 광기로 삶을 마친 히틀러나,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Sep 26, 2019
18 min

예수님께서 수가 마을 여자에게 영과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닙니다. 잘살아 보겠다고 애쓴 삶이 결국 그랬습니다. 자기 삶에 지칠 만하였습니다.
특이하게도 여자는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그런 줄 이미 아시고 우물가에서 여자를 기다리셨지, 싶습니다.
우물물은 갈증을 해소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그렇습니다. 하여, 당신께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방법이, 세상을 사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에 따른 삶에서 영혼에 따른 삶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니 너도 하나님께 영으로 나아가라.
거기다 하나를 더 보태어, 알레데이아(ἀλήθεια)로, 진실로 나아가라.’ 그러셨습니다.
육체는 삶의 진실(ἀλήθεια)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최우선 가치는 생존입니다. 무엇이 이익이냐, 그것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육체는 원래 생존을 위하여서라면 거짓도, 프슈도스(ψεῦδος)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Sep 6, 2019
12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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